“
요양원에 있는 동안 내 돈으로 비용을 내줘.
내가 죽으면 장례도 치러줘.
남은 재산은 기부단체에.
”
1인 고령 가구가 늘면서 이런 요구를 법적 효력 있는 계약으로 묶어두려는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유언장 대신 금융기관과의 신탁 계약으로 사후 재산 이전을 설계하는 유언대용신탁이 초고령사회의 새 상속 수단으로 빠르게 자리를 잡고 있다.
5대 시중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은 2020년 말 약 9,400억 원에서 2025년 말 4조 5,023억 원으로 5년 새 약 4.8배 늘었다. 2024년 말 한국이 65세 이상 인구 비율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같은 해 국내 상속재산 규모는 44조 5,169억 원으로 2020년(21조 4,779억 원)의 두 배를 넘어섰고, 상속세 납부 확정 인원도 2만 1,193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 유언장과 무엇이 다른가
유언대용신탁은 신탁법 제59조에 근거한다. 위탁자(고객)가 살아 있는 동안 재산을 금융기관에 맡기고 본인이 수익을 수취하다가, 사망과 동시에 사전에 지정한 수익자에게 재산이 자동 이전되는 구조다.
유언장과의 결정적 차이는 집행 속도와 유연성에 있다. 유언장은 사망 후 법원 검인을 거쳐야 효력이 발생하지만, 유언대용신탁은 사망 즉시 계약대로 집행된다. 공증도 검인도 필요 없다. 상속 분쟁으로 소송이 진행 중이어도 계약 내용은 그대로 이행된다.
수익자도 법정 상속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인, 기부단체, 복지법인 등 제3자도 지정할 수 있고, "30세가 되면 연금 형식으로 지급해줘", "나를 끝까지 부양하는 자녀에게 이전해줘" 같은 조건도 계약에 담을 수 있다. 생전에 언제든 내용 변경이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 치매 대비, 1인 가구 사후 처리, 돌봄 연동
유언대용신탁에 주목하는 이유는 세 가지 접점 때문이다.
첫째는 치매와 인지 능력 저하 대비다. 유언장은 사망 후에야 개봉되기 때문에 작성 당시 판단 능력 문제가 사후 분쟁으로 불거지는 경우가 많다. 유언대용신탁은 계약 당사자인 금융기관이 생전부터 관여하므로 이상이 생기면 즉각 확인하고 수정할 수 있다.
치매 진단 후라도 의사능력이 남아 있는 기간에 계약이 가능하다. 재산관리 능력을 잃은 이후에도 요양비·병원비가 자동 지급되도록 설계할 수 있다.
둘째는 1인 고령 가구와 무연고 고령자의 사후 처리 문제다. 상속인이 없거나 가족과 단절된 경우, 지인이나 기부단체·복지법인을 수익자로 지정할 수 있다. 장례와 봉안 비용도 신탁 안에 담아둘 수 있어 고독사 이후 무연고 처리 문제를 사전에 완화하는 수단이 된다. 사후 잔여 재산을 원하는 곳에 기부하는 사회공헌형 상속도 가능하다.
셋째는 돌봄과 상속의 연동이다. "나를 끝까지 부양하는 자녀에게 재산을 넘겨줘", "요양원 비용을 내 신탁 재산으로 납부해줘"처럼 돌봄 제공 여부와 상속을 연결하는 설계가 가능하다. '불효방지신탁'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령 부모에서 고령 자녀로 상속이 이루어지는 '노노(老老) 상속' 시대에 대비한 수익자연속신탁(신탁법 제60조)도 함께 활용된다.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 재산이 손주에게 자동 이전되도록 설계하는 방식이다.
□ 유류분은 피할 수 없다
유언대용신탁이 만능은 아니다. 핵심 쟁점은 유류분이다. 대법원은 2024년 7월 유언대용신탁 재산도 유류분 산정의 기초가 되는 증여재산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특정인에게 재산을 몰아주더라도 다른 상속인이 유류분 반환 청구를 제기할 수 있다는 의미다. 유류분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정교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분쟁을 피하기 어렵다.
부동산을 신탁재산으로 설정할 경우 신탁등기 시 수익자와 신탁 목적이 등기기록에 포함돼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상속 내용 공개를 꺼리는 위탁자에게는 단점이다. 세제 혜택이 없다는 점도 미국·영국 등과 비교할 때 접근성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자산 범위 확대(농지·담보권 신탁 제한 완화), 의결권 행사 제한 완화, 부동산 신탁등기 기밀성 보장, 세제 혜택 도입 등 제도 개선이 이루어져야 유언대용신탁이 더 넓은 계층에서 실질적인 웰다잉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상속 분쟁이 늘고 1인 가구 고령자가 증가하는 현실에서, 유언대용신탁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넘어 '죽고 나서 내 삶의 흔적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법적 답을 주는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