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거나 질병으로 인해 기억력이 흐릿해지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상태는 자칫 자신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신체적·재산적 피해를 막기 위해 운영 중인 '성년후견' 제도가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기보다는, 후견인이 모든 결정을 '대신'하는 형태로 운용되어 오히려 인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독일, 미국, 영국 등 주요 선진국들은 성년후견제도의 패러다임을 '대행(Substitute)'에서 '지원(Support)'으로 전환하며 당사자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하고 있어 주목된다.
■ 독일, 민법 전면 개정… "후견은 대행 아닌 지원"
독일은 지난 1월 1일 시행된 개정 민법전을 통해 성년후견제도의 틀을 완전히 바꿨다. 핵심은 성년후견이 당사자의 의사결정을 '대체'하는 것을 막고, 「UN장애인권리협약」 제12조에 따라 '법적 능력을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데 있다.
개정된 독일 민법에 따르면, 질병이나 장애가 있더라도 본인의 사무를 처리할 수 없어서 후견이 꼭 '필요한 경우'에만 선임이 가능하다(제1814조). 또한 의료시설 입원이나 거주지 이동 등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는 후견법원이 임무 영역으로 정한 경우에만 결정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제1815조).
특히 "내 후견인은 내가 정한다"는 원칙 아래, 당사자가 희망하는 후견인이 있다면 법원은 이를 존중해야 한다. 아울러 후견인은 피후견인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친족이나 신뢰 관계에 있는 지인에게 주기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의무도 진다.
■ 미국·영국·일본, "현명하지 못한 결정도 존중받아야"
미국과 영국, 일본 역시 당사자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제도를 운용 중이다.
미국 텍사스주와 메인주 등은 「의사결정지원제도」를 도입했다. 조력이 필요한 성인이 지원자와 위탁 계약을 맺고 계약 범위 내에서만 지원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활성화했다.
영국은 「의사능력법」을 통해 당사자의 권리를 보호한다. 주목할 점은 "어떤 사람이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의사결정 능력이 없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영국은 후견인이 당사자의 권리, 희망, 선호도를 반영해 '최선의 이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도록 법적으로 지원한다.
일본 또한 2022년부터 '성년후견제도 이용 촉진법 전문가협의회'를 통해 의사결정지원제도를 국가 계획으로 논의하고 있으며, 관련 가이드라인을 배포해 본인의 판단 능력이 남아있는 한 자기결정권을 최대한 존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 한국, 여전히 '대행' 위주… UN 권고 이행 시급
반면, 한국은 현행 「민법」에 따라 성년후견을 법정후견과 임의후견으로 구분하고 있으나, 실제 운영에서는 후견인이 피후견인의 욕구나 가치관을 반영하기보다 제3자의 시각에서 의사결정을 대행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장애인복지법」, 「노인복지법」 등 관련 법령들도 자기결정권 행사가 어려운 성인에 대한 '대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해 UN 장애인권리위원회는 지난 2014년, 한국의 성년후견제도가 당사자의 의사를 억압할 소지가 있다며 '지원적 의사결정체계'로 전환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보호라는 명목하에 당사자를 배제하는 제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우리나라도 세계적 흐름에 발맞춰 후견인이 '대신 결정하는 사람'이 아닌 '결정을 돕는 사람'이 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